양귀비의 죽음, 행방불명의 비밀을 알아보자

양귀비는 정확하게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나? 

양옥환(719년~756년)은 당나라 때의 후비, 궁정 음악가, 무용가, 중국 고대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제나라 공 양현염의 딸로 성격이 완곡하고 자질이 풍부하며 노래와 춤에 능하고 음률에 정통했다고 합니다. 처음 수왕 이도에게 시집가서 수왕의 비로서 살았습니다. 개원 28년(740), 여도사로 출가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종은 양옥환을 환속시키고, 궁에 들어가 정식으로 귀비로 책봉하여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천보 십오년(756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귀비는 당 현종 이융기를 따라 촉으로 망명하여 마외역을 지나다가 병사들이 난의 책임을 물어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하여 사사되었습니다. 

 

양귀비

 

위의 내용은 정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양귀비의 이력이라 할 수 있는데 양귀비의 죽음과 관련된 정확한 자료가 부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그럼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양귀비의 죽음 또는 행방불명과 관련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양귀비의 비극적인 죽음 후의 역사 기록 - "피부는 망가졌으며 향낭이 남아 있습니다"

서기 757년 양귀비가 죽은 지 일 년 후인 피난해 있던 당 현종 이융기가 마침내 2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의 이융기는 그가 예전의 천하를 호령했던 이융기가 아니라 그저 옛 추억을 그리며 살아가는 노인의 형색을 한 상왕 신분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가장 보고 싶은 것은 그의 귀비 양옥환이 그를 위해 춤을 추고, 그를 위해 비파곡을 몇 곡 연주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쉽게 이룰 수 있었던 이러한 소원은 이제 불가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귀비 양옥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양귀비를 위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을 시켜 양귀비가 비명에 갔던 마외파의 땅속에 묻혀있는 양귀비의 시신을 개장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양귀비를 위해 장례를 치르려했던 당현종

당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신구당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도 있습니다. 파견된 사람이 돌아와서 당 현종에게 관을 열어 보니 "피부는 망가졌으며 향낭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는데, 구당서와는 다르게 신당서에서는 향낭이 남아있다고만 말하고 시신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마외파에서 죽은 지 불과 1년 남짓 되었기 때문에 방부처리되지 않은 시체는 이미 부패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백거이의 장한가 - 마외파의 무덤 아래 양옥환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

[신당서]는 북송 기간 동안 구양수가 기전체의 사서를 편찬한 것으로 당나라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신당서] 편찬 과정의 중요한 참고 서목은 바로 오대십국 시대의 [구당서]입니다. 그래서 구양수는 이 일에 대한 기록을 못 봤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피부는 이미 나빠졌다"라는 네 글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분명 당나라 때 문학작품이든 일부 필기체 사서에서든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 가지 추측의 중심점입니다. 그래서 '피부는 이미 상했다'라는 네 글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문학작품에서 백거이가 쓴 [장한가]는 이런 추측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장한가에는 "마외파의 흙 속에 옥안공사처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즉, 마외파의 무덤 아래 양옥환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양귀비 석상
시안시 근교 화청지 안의 양귀비 석상

 

그러나 위와 같은 기록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양귀비의 죽음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으며, 양귀비의 혼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외파입니까, 아니면 동해 일본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곳입니까? 아니면 신라 땅으로?

그녀는 마외파의 군변 당일 자결하였는지 아니면 탈출에 성공하여 타향에서 객사하였는지 동서고금의 많은 사학자들과 민간 애호가들이 해석하고 있으나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일단 구당서의 기록이 가장 믿을만한 것 같습니다.  사건의 주체였던 당현종이 사람을 시켜 개장하려 했던 역사적 사실은 부인할 수 가없는 양귀비가 죽었다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요?  아니면 살려두고 거짓으로 행동한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하던 한 여인을 색욕에 눈이 멀어  탐하고는 정치적으로 몰리자 원인을 여자에게 돌리고 내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에도 보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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