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과정에서 촉당에서 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현 토착민에게 가혹한 단합을 하여 반대 세력을 숙청합니다 소수 인력의 형주 지역 세력이 촉 땅을 무력으로 병합한 후 어쩔 수 없는 권력 투쟁이었을 겁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재상으로써 전권을 행사하고 나라 안의 주요한 주의 목사이며 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숙청한 점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삼국지에서 관우와 더불어 가장 부풀려진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편협한 역사 서술이 후대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여름에 많이 읽는 소설 삼국지에서 제갈량에 관하여 소설이 아닌 역사기록에 의한 진실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너무 먼 공명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초기 삼국지의 민간 판본에 공명은 간신 또는 역적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제갈량은 적벽대전 이후 황제가 된 유비와 멀어지기 시작하여 말이 승상이지 유비는 그에게
승상부(오늘날의 국무총리실)도 설치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군사업무에서 손을 떼고 내부 관리만 합니다
유비가 죽은 후 비로소 전면에 나섭니다. 유선을 거의 연금 상태로 묶어두고 본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킵니다. 유비가 죽기 전 후주를 부탁한 군권을 가진 다른 대신도 조그만 잘못을 빌미로 평민으로 강등시켜 제거됩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후주 유선은 총명하였다고 합니다. 제갈량은 죽은 유비의 이름을 빌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후주와는 훈계조로 대화를 하는 등 황제로써 대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공명이 "유비께서 내게 지시하시길..."라고 말하면 아무도 토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공명이 죽은 후 후주는 제갈량의 승상부(오늘날의 국무총리실)를 폐쇄하고 그가 가졌던 권력을 양분하였으며 심지어 제갈량의 사당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비 사후 그는 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과실을 물어 정적들을 제거합니다. 자기 오른팔인 친구 아들 마속을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요 군사 업무를 맡겼으나 그의 실수로 인하여 오랫동안 준비하여 실행한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책임을 물어 그를 참하고 본인 스스로를 한직급 아래로 강등시킵니다, 말이 한 등급이지 이전과 이름만 다를 뿐 이전과 같은 권력의 승상이었습니다. 사실 책임은 전쟁터에서 그를 기용 배치한 자기 책임이 더 큰데...
공명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게 해준 사건은 출사표에서 본인이 밝힌 삼고초려입니다. 황제가 될 사람 또는 황제가 스스로 인재를 찾아 세 번 방문 요청한 사건은 중국 역사에 오직 공명뿐입니다. 사실 삼고초려 이 표현만으로는 유비가 그를 기용하기 위해 방문했다기보다는 여러 번 그의 집을 방문하여 정치 현안에 대하여 담소를 나누었다는 것이 대부분 역사가들의 견해입니다. 고대에 삼은 여러 번의 뜻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두 사람은 형주에서 6년 동안 함께 살았고 그 지역에서 유명한 유비와 형주 목사의 친척인 제갈량은 서로 이미 아는 사이였습니다.
후대 출세하지 못한 나관중을 포함 자칭 본인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언젠가 자신도 공명처럼 불러주겠지 하면서 공명을 로망으로 삼아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를 영웅, 신격화 시킨 것입니다.
후대 많은 학자들이 그를 평가하기를 "정치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군대를 이끌고 전쟁하기를 좋아하나 용병술이 없다." "포부와 이상은 높으나,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르고, 결단력도 없을 뿐 아니라 능력이 따라주지 못했다."
제갈량 수하 중 2인자였고 제갈량에게 적의 삼장 부룰 기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했던 명장 위연은"제갈량은 겁이 많고 벌어질 일을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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